Work Text:
Wiens Auge
빈의 눈
현재로서는 대부분이 유실되었다.
남아있는 기록은 그저 떠도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무엇을 보았는가?
누군가가 대답했다. 우리는 도시를 보았습니다.
기울고 물이 넘쳐 흐르는 도시를 보았습니다.
Side A.
Albrecht Miller는 자신이 객관적으로 마도학이나 예술에 썩 재능은 없지만, 사람 보는 눈 만큼은 뛰어나다고 여겼다. 그리고 또 제 눈썰미와 눈치 정도면 빈의 젊은 마도학자 하나, 즉 자기 자신 정도는 너끈히 먹여 살릴 수 있다고 자부하곤 했다.
일례로 그는 현재 빈 최고의 예술가들과 사적으로 모이는 작은 카페의 야외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물론 우연이 아닌 암묵적인 정식 멤버로서 말이다. 알브레히트는 눈을 몇 번 깜박였지만 보이는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도시는 활기로 가득했고 선선한 바람과 따스한 햇볕이 그를 보듬었다. 이 자리와 위치는 그 스스로 쟁취해 낸 것이다. 그러니 남은 할 일은 느긋하게 친구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같은 각도로 잔을 기울이는 일뿐이다. 그는 그렇게 했다.
“밀러, 지난번 마리안힐퍼 거리에서 일어난 결투에 리볼버를 조달해 주어 정말 고마웠어. 엄밀히 말하자면 자네와 연관된 결투도 아니었고, 내 일조차 아닌 부탁이었는데 말이야. 이렇게나 연고 없는 마도학자라도 얼마든지 그저 마도학자이기만 하면 서로를 돕자는 게 우리 모임의 목적이기도 하잖아? 밀러는 우리 중 이를 가장 성실히 수행해 내는 친구야. 소중한 인재라고…. 내 말은, 그렇기에 내 친구 중 자네를 모르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야!”
땅달막한 사내가 침을 튀기며 말했다. 그는 알브레히트와 몇 살 차이 나지 않았으나 벌써 정수리 부근이 자연광에 조금씩 빛을 보고 있었다. 알브레히트는 대답 대신 겸연쩍게 웃으며 잔을 내려놓고 손사래를 치는 시늉을 했다. 그는 오랜 경험으로 이런 서두에는 겸손과 조용함이 미덕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밀러에게 네 친구를 이렇게 한 번에 한 명씩 소개할 참인가? 모든 빈의 마도학자가 마도술 허가증을 발급받을 즈음 끝나겠군그래.”
“급하기는, 빌헬름. 오늘은 귀한 분의 시간을 내는 날이잖아. 그리고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 올참이라고.”
“아아, 그렇지.”
알브레히트의 손이 살짝 떨렸다. 젊은 예술가 친구들은 종종 만남의 기대감을 높이기 위해 소개받을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는데, 오늘도 아마 그러했다. 대화는 금방 다른 주제로 흘러갔다. 그가 이해한 척하고 있는 예술에 관한 이야기, 시답잖은 인간사, 시시콜콜한 뒷골목의 사건들. 무엇으로 시작되었든지 대부분은 제도에 대한 불평으로 끝이 났지만, 알브레히트는 거기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는 않았다. 아무도 무의식 속 드러나는 선망을 남에게 들키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적당히 맞장구를 치거나, 했던 감상평을 어색하지 않도록 반복해주면 친구들은 만족했다.
일부러 느리게 마신 커피가 거의 바닥을 보일 때까지 모임의 ‘귀한 분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해가 약간 기울었다. 그의 잔 외의 커피잔은 전부 텅 비어버렸다. 알브레히트는 살짝 초조해졌으나 태연한 눈빛으로 도로의 양 끝을 티 나지 않게 힐끔거렸다.
“그런데 여간 늦는 게 아니야.”
“어딘가에서 갑자기 영감을 받아 버렸는지도 몰라. 알다시피 그의 자유 의지는 끈질기고 강렬하잖아. 마치…….”
그의 작품처럼!
두 사람은 동시에 말하며 알브레히트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얼토당토않은 화음에 그는 그저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오늘 만나게 될 자는 강렬한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로군. 이건 빈에서는 아무런 정보값이 없는 문장이다. 알브레히트가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그의 뒤에서 한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아, 시간도, 때로는 여자조차 나를 기다려 주지 않으나 오로지 그대들만이 여기 앉아 나를 반기는구나. 부디 용서하지. 내 이렇게 된 이유는 아주 타당하거든.”
거만하고 당당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는….
알브레히트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빈의 젊은이라면 그를 모를 수 없었다. 그의 감히 재능이 넘친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여동생과 가문을 두고 떠도는 소문까지, 알브레히트는 제집 앞 보도블록 자국처럼 꿰고 있었다. 그는 상대와 눈을 마주쳤을 때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채 다물질 못했다. 그가 말을 잇지 못하는 동안 모임은 자연히 자리를 옮겨 술자리를 대동하는 모양으로 흘러갔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 어떤 번거로운 뒤풀이가 이어지더라도 이 모임의 가치는 훼손될 수 없었다.
알브레히트는 상대가 장황히 말을 늘어놓는 내내 옅은 희열에 목덜미가 선득하였다. 자신의 눈은, 이루어낸 모든 관계는 전부 잘못되지 않았다!
알브레히트는 조금 뒤에야 겨우 입을 열어 침착하려 애쓰는 목소리로 상대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테오필, 당신과 이런 자리에서 만날 수 있어 더할 나위 없는 가문의 영광입니다. 저는 이런 우연한 만남은 감히 상상만 좀 할 줄 아는 일개 젊은이인데, 정말 믿기질 않는군요….”
물론 테오필은 그의 목소리에 섞인 긴장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대답 없이 눈이 마주치자, 알브레히트는 조금 더 힘을 주어 말을 이었다.
“이졸데 폰 디터스도르프 양이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해 아쉽네요.”
여동생의 이름을 들은 테오필의 눈에 영문 모를 생기가 돌았다. 알브레히트는 자신이 올바른 반응을 한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긴장감에 살짝 축축해진 오른손을 바지에 슥 문질렀다. 그는 테오필과의 만남을 이번 한 번으로 끝낼 생각이 조금도 없었기에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이졸데, 나의 동생…. 유감이지만, 이 모임에 늦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내 눈에 유약하고 여린 아이입니다. 종종 짐작하지 못한 것에도 쓰러지고 만단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기민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렇습니다, 이론상으로는. 이렇게 날씨 좋은 날에! 무대 연습을 마치고 나올 예정인 동생을 저는 기다리던 중이었지요. 이곳으로 완벽하게 도착할 수 있었는데, 내 동생은 여름이 다 지난 빈의 상냥한 햇빛에조차 어지러워하더군요. 비틀거리는 아이를 부축해 집에 돌려보내고, 아름다운 거리에 시선을 뺏겨 한참을 돌아왔더니 이런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테오필의 우아한 변명에 알브레히트는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이졸데를 푹신한 의자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는 방식 외엔 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조명이 아닌 햇빛 아래, 연기가 아닌 본인의 걸음으로 비틀거리는 이졸데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소위 말하는 추상적인 예술과도 같아서, 그의 능력 밖으로만 느껴졌다. 그러는 동안 테오필은 능청스럽게 알브레히트를 바라보았다.
“아쉽다니 마음이 쓰이는군요. 방금 이야기했듯 우리가 다 같이 장소를 옮길 예정인데, 나의 절친한 친우 중 하나를 만나볼 수 있을 겁니다. 하인리히, 그도 당신을 아주 반길 테니까요. 또, 결투에 관한 이야기도 듣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빌헬름이 몇 번 당신의 이름을 언급했던 거로 기억합니다.”
알브레히트는 제안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마침 리볼버에 관한 건 테오필이 몰랐더라도 지나가듯 꺼내 볼 예정이었던 주제다. 상대의 기억에 남을만하다면 뭐든 좋았다. 그는 이에 정통했고, 어쩌면 기꺼이 한 정을 구해 줄 수 있었다…. 테오필이 어떤 이유에서든 아주 조금만 원한다면 말이다. 빈에서 자신만큼 빠른 사람이 없다는 점도 암시해 두는 게 좋을 것이다. 알브레히트는 상대를 마주 보며 마찬가지로 웃었다. 젊은 청년의 쾌활한 미소였다.
Side B.
빈은 여느 때처럼 거리는 활기차고 건물은 개성적이며 박동하는 예술이 실용과 어지러이 결합하여 춤을 춘다. 다리 아래에선 어린 잡상인들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자신의 좌판을 자랑스레 펼쳐 놓았다. 볼품없는 물건이라도 앞에 선 사람이 어깨를 편 채 당당하다면 나름대로 힘을 가지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거리를 두고 다리 아래까지 내려와 물건을 살피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었지만, 아주 적지도 않았다. 적어도 가치 없다고 일갈할 정도는 아니었다. Benjamin은 햇볕에 잘 말린 헝겊 여러 장을 개켜 쌓아 짐을 정리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가 오늘 처음 본 하늘이었다.
잠시 푸른 하늘을 감상하던 작은 어깨를 누군가의 거친 손이 무신경하게 툭툭 쳤다. 벤야민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헝겊이 깨끗한데, 한가한 모양이네.”
“…. 방금 빤 거야.”
“손님이 없다는 걸 변명하는 건 아니겠지?”
그는 대체 그 사실의 어느 부분을 변명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일리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고는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벤야민은 종종 일리치의 눈이 번득일 때마다 꼭 뭐라도 내줘야 할 것처럼 주눅이 들곤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가 가진 것 중 일리치가 가지고 싶어 하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쉽게 말해서 벤야민은 다리 아래의 사람 중에서도 빈털터리에 속했다. 일리치는 꼭 어른처럼 한숨을 푹 쉬며 벤야민의 어깨에 한쪽 팔을 턱 걸쳤다. 다른 한 손에는 동전 몇 개가 쥐어져 있었다. 벤야민은 일리치가 그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았다. 그는 아마 이 자리에서 갑자기 시체가 되거나, 끈적한 물처럼 녹아내린대도 그 주먹을 풀지 않을 것이다….
“벤, 아무튼 너는 소질이 진짜 없어. 도와주려 해도 말이지. 늘 이야기하지만 꾸준하게 너를 찾아줄 손님 몇 명만 만들어 놓으면 된다니까. 반면에 넌? 기껏 손님이 와도 돈을 받고 나면 다신 안 볼 사람 취급을 하잖아! 그렇게 하면 안 돼.”
“나는 괜찮은데….”
“쉬잇, 됐어. 오늘은 예상보다 더 받았으니 네게 저녁에 감자 한 알 정도는 나눠 줄 수 있는데 오늘뿐이야. 벤 너는 장사하는 데에는 더 재주가 없어서, 이 일로 잘돼야 해. 널 걱정해 주는 거라고.”
일리치는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가 무얼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했다. 벤야민은 그가 일주일째 입고 있는, 어쩌면 항상 똑같았을지도 모르는 바지의 색도 헷갈린다. 애초에 시선이 거기 가 닿았던 적도 없어서 모르겠다. 같은 빈민인 처지에 서로 시선 내릴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네가 나처럼 장사꾼이 됐다고 생각하고 문제를 내주마. 자, 거울 상인에게 네가 물건을 팔아야 한다면 뭘 팔 거야?’
‘……. 거울을 닦을 좋은 헝겊 같은 것?’
‘꽤 잘 맞췄지만, 헝겊은 이미 네가 손에 들고 있으니 다른 답을 해 봐.’
‘깨지거나 할 걸 대비해서 붙일 풀 같은 것도 팔면 좋겠지….’
‘바보 벤. 거울을 파는 장사꾼이 그게 왜 필요해? 깨진 거울을 대신할 새 거울을 파는 게 그의 일인데!’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빈은 언제나 다양하고 새로운 물건을 원했고, 벤야민은 도시가 대체 뭘 원하는지 알 자신이 없다. 다행인 건 이곳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각양각색의 구두를 신고 다닌다. 그러면 걱정할 일이 없다. 세상에 더러워지지 않는 물건은 없으니까. 잘 기억나지 않아도 해가 뜨고 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무렵부터 벤야민은 구두를 닦을 줄 알았다. 일리치가 말을 잘하는 것처럼 구두를 닦는 일은 그가 잘하는 거였다. 돈을 번다거나 하는 부분에서는 얼버무려야 했지만 말이다.
벤야민이 한 쌍의 구두를 닦는데 누구보다 빠른 건 아니었지만 스스로 꼼꼼하다고 말할 정도는 되었다. 그가 닦은 구두를 신고는 곧바로 흙을 내딛기가 마음 불편할 정도였다. 그는 약을 지나치게 많이 바르지도 적게 바르지도 않았다. 그래서 약이나 솔을 새로 하나 사면 이것으로 몇 명의 손님을 받을 수 있는지 정확하게 잴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벤야민이 본인만의 방식으로 다시 묶은 구두끈은 어지간하면 풀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살면서 같은 손님을 받은 적은 있어도 같은 구두의 끈을 두 번 묶었던 적은 없을 거라고 여겼다. 일리치는 언제나 끈을 적당히 느슨하게 묶어야 풀릴 즈음 손님이 자신을 찾을 거라 조언해 주었지만, 모양을 똑바로 유지하며 어정쩡한 강도로 묶는 건 더 어려웠다. 굳이 매듭을 묶는데 재주를 부려야 한다니? 벤야민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한 이치로 오늘도 일리치의 손에는 금화가 있고 벤야민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거리로 나와 쭈그려 앉은 벤야민은 정리한 헝겊을 옆에 둔 채 구두 약통을 주섬주섬 꺼냈다. 다리 아래에서 각자의 물건을 정리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서로의 물건 사이로 교묘하게 발을 디뎌 걸었다. 그게 누군가의 물건임을 알고 있으니 그런 걸지도 몰랐다. 여기는 다르다. 거리의 사람들은 무언가가 발치에 놓여 있으면, 그게 마도학 룬스톤인지 돌멩이인지 구분하지 않았다. 발에 걸리거나 걸리지 않는 무언가라고 여겼다. 덕분에 벤야민의 손길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통을 세워두는 그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림자의 머리가 아주 컸으므로 벤야민은 상대가 챙모자를 쓰고 있다는 걸 고개를 들지 않고도 눈치챘다.
“날씨가 좋죠? 바람이 필요한 만큼만 불고 햇살은 또 필요한 만큼만 따뜻하네요. 전 이즈음의 계절을 정말 사랑한답니다. 이런 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자연의 이불에라도 들어가 있는 기분일 텐데! 어때요? 그런가요?”
벤야민에게 이불이란 더는 쓸 수 없는 헝겊을 기워 자신의 크기만큼 만들어낸 무언가였기에 손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몰랐다. 그가 고개를 들자, 상대가 코를 찡긋거렸다. 걸려있는 안경이 살짝 들썩인다.
“네. 그렇네요.”
그는 적당히 맞장구치며 상대의 구두를 살폈다. 제법 질 좋은 가죽이었으나 까마득히 비싸 손대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또, 보기에 익숙한 모양새다. 실용적이고 편한 디자인은 대부분 비슷하기 마련이다. 다만 도대체 어디를 돌아다니는 건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흙먼지가 묻어 말라붙어 있었다. 벤야민은 이 손님이 조심성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라고 짐작했다. 구두의 코가 유달리 반질거리는 것만 봐도 알았다.
“일리치에게 들었어요. 신발이야 신다 보면 반드시 더러워지는 거고 아무에게나 맡기면 그만이지만, 기왕이면 자신이 아는 구두닦이에게 맡기는 게 편할 거라고 말이죠. 그게 당신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쩐지 알 것 같군요! 눈만 봐도 알 수 있어요.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지요. 맞나요?”
“그런 것 같아요….”
벤야민 역시 이 손님이 누구인지 일리치에게 들어본 것 같았다. 그녀는 생각보다 말이 더 많았다. 일리치라면 곧잘 재치 있는 주제로 대화를 유도하든지 해서 콧수염 하나라도 더 팔아치울 텐데, 벤야민은 달리 할 게 없었다. 구두를 닦으며 대화를 나눈다고 닦아야 할 구두와 다리 한 짝이 어디선가 튀어나오고, 그로 인해 받을 돈이 더 늘어나지는 않는다! 그녀가 어떤 마도학자인지는 몰랐지만, 그런 마도학이 존재한다고 들어본 적은 없다.
“어쨌든, 난 이런 햇빛 좋은 날에는 밖에서 거울을 잘 꺼내지 않아요. 빛이 실수로 반사되어 눈을 부시게 하는 일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저희 윙글러 가문의 거울은 그런 용도로 만들어지지 않았거든요! 아, 이건 그냥 당신이 거울로 제 구두를 비추고 있어서 하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거울을 보고 있자니 생각이 난 거죠. 좀 민망하네요. 오빠는 제가 또래 여자아이 중 가장 더러운 구두를 가졌을 거라며 자주 놀리곤 하는데, 덕분에 그쪽의 일이 아주 많을 것 같군요….”
그의 손길이 평소보다 확연히 빨라졌다.
“크흠. 미안해요.”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닦을 부분이 많은데요.”
“조금 더 쥐여 주신다면 문제도 없죠.”
벤야민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자기 입에서 일리치가 할 법한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민망해져 머리라도 긁으며 없던 양 넘기고 싶었다. 하지만 한쪽 손은 구두약이 발린 솔을, 다른 한 손은 구두를 짚고 있었기에 불가능했다. 이 손님의 끝없는 대화가 질려서 그랬나? 벤야민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록 손님이 구두 한 짝을 반쯤 닦는 동안 한낮의 새 한 쌍보다 많은 말을 했지만 말이다.
“오, 그래요! 물론 그럴게요. 그거 말고 제가 뭔가 더 도와드릴 만한 게 있을까요?”
“손님의 구두가 오래오래 깨끗하기를 바랄 뿐이지요.”
“크흠, 조심성 있게 걸으려고 노력은 하고 있어요! 그나저나 이상한 말이네요. 세상에 더러운 구두가 많으면 좋지 않나요? 이렇게나 실력이 좋으면 돈을 그만큼 더 벌 수 있을 텐데.”
“글쎄요.”
양손으로 헝겊을 팽팽하게 쥔 채 무심하게 구두코를 털어냈다. 그럭저럭 멀끔해 보인다. 벤야민은 후후 붙어가며 조금 더 광을 냈다.
“그렇다고 온 세상 구두가 더러워지길 바라는 건 뭔가 이상한 말 같은데요. 기왕이면 덜한 게 좋죠. 아픈 사람이 늘어났으면 하는 의사가 있으면, 그 의사가 이상한 사람 아닌가요.”
한참 대답이 없어 벤야민은 반대쪽마저 꼼꼼히 닦은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손님은 생각에 잠긴 듯 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벤야민은 기다리는 동안 구두끈을 두 번 깔끔하게 묶었다.
“아픈 사람이 늘어났으면 하는 의사가….
이상한 의사다. 맞는 말이에요. 그렇지요. 제가 무언갈 잘못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어머! 벌써 끝났군요. 정말 빠르네요. 자, 여기 있어요. 금방 또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빨리 구두를 더럽히지는 않을게요, 약속해요! 저는….”
생각에서 빠져나온 손님은 또 길게 말을 늘리다가, 아무렇지 않게 더러워진 그의 손을 잡고 흔들며 몇 번이나 악수한 뒤 거리 뒤편으로 사라졌다. 벤야민은 멍하니 일리치가 들고 있었던 것과 같은 금화들을 바라보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신이 없어서였을까, 방금까지 세 번 넘게 들은 손님의 이름이 어쩐지 기억나지 않았다.
Side C.
Catherine Jones는 말없이 창가를 바라보았다. 날이 좋았다. 이 창가는 이 레스토랑에서 제일 햇볕이 잘 들어오고 스테인드글라스의 빚이 가장 아름답게 지는 자리다. 그와 앨버드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 생각에 캐서린은 잠시 미소 지었으나 이내 표정을 굳혔다. 더는 아닐 수도 있지. 그가 중얼거렸다. 아닐 수도 있어. 식사는커녕 아직 테이블에는 접시 하나조차 올라오지 않았는데 속이 울렁거렸다.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나?”
곱슬의 갈색 머리 남자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다가와 건너편에 앉았다. 그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거칠게 훔쳐내려다 움찔하고는 조심조심 두드려 닦아냈다.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캐서린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안 어울리네요.”
캐서린의 웃음소리에 앨버드는 결국 같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웃음이 잦아들고 그의 몫을 주문한 후 웨이터가 물러나자 잔잔한 고요가 둘 사이를 감돌았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요. 왜 이리 정신이 없는지. 거의 열흘 만에 보지 않나요? 늦은 주제에 염치없지만, 오늘 만나는 걸 정말 기다렸거든요. 이게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앨버드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다정하고 잔잔했다. 한편으로는 간절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 이유는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다. 캐서린은 잠시 침묵했다. 앨버드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그 역시 앨버드와 같은 기분이었다. 사실을 직시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식전 빵과 샐러드를 거의 다 먹을 때까지 두 사람은 그저 애정이 어린 눈빛만 몇 번 나누었다.
접시를 오가는 손끝이 스칠 때마다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캐서린은 작게 몸을 떨었다.
“날이 추운가요? 이 자리가 제일 따뜻할 텐데.”
앨버드는 변함없이 이런 부분에 눈치가 없었다. 캐서린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박이며 정면으로 그를 마주했다.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들은 것처럼.
“이제 겨우 여름을 지났어요, 앨버드. 그럴 리가요.”
“그럼 실례했습니다.”
머쓱한 표정으로 소금통을 건네는 앨버드의 손에 반지가 없었다. 그는 허풍과 어울리지 않았지만, 종종 팔이 잘려 나가더라도 반지를 빼고 싶지 않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캐서린은 심호흡하며 소금통을 살짝 밀어내 받지 않았다. 대신 소리가 나지 않도록 목을 골랐다. 둘 중 누군가가 어려운 이야기를 먼저 꺼낼 수밖에 없다면, 그건 결국 캐서린이다.
“아직 괜찮은 상대가 없었나요?”
“…….”
“뭐어, 있었다면 오늘 자리에 나오지 않았겠죠. 저도 알아요. 그리고 저 역시 그런 상대가 없어서 나온 거예요. 당신은 이게 궁금했을 거잖아요? 그러니 이상한 생각이라던가, 걱정하지 마세요.”
됐으면 소금 말고 옆의 케이퍼 좀 건네주시겠어요? 전 연어를 시켰거든요. 캐서린은 무뚝뚝하게 손짓했다. 몇 번이나 입을 벙긋거리던 앨버드는 더듬거리다가 그의 손에 케이퍼 통을 쥐여 주었다.
캐서린은 어렸을 적부터 앨버드 윙글러와 어울려왔다. 둘은 동갑으로 비슷한 규모의 집안에서 자라 금방 친해졌다. 거울 사업과 농유업을 하시는 부모님은 사업적으로 그다지 공유하는 부분이 없었지만, 되려 그렇기에 서로 얼굴 붉히는 일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앨버드는 다정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캐서린이 무엇 하나 좋아하는 기색을 내비치면, 정말이지 됐다고 할 때까지 자신을 위해 그걸 가져다주었다. 캐서린이 웃으면 본인이 망신을 당해도 같이 웃기 바빴다.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부끄럼 없이 할 줄 알았다.
그는 빈에 널린 흔하디흔한 청년처럼 생겨선 막상 비슷한 인간상을 찾자면 드문 사람이었다. 캐서린은 사람의 몸이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지 배워본 적 없지만, 앨버드의 머릿속 한구석은 오로지 그런 것만 생각하기 위해 만들어져 있다고 여겼다. 그런 그가 좋았다. 비록 연애엔 좀 눈치가 없고 우유부단할지언정….
나이프를 든 앨버드의 손이 삐끗거렸다. 이전이었다면 캐서린의 식사를 먼저 썰어주었을 것이다. 소금통을 거절당하니 더는 손 내밀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의기소침한 얼굴로 자신 몫의 스테이크를 먼저 써는 자세가 어딘가 엉거주춤하다. 보고 있자니 속이 무언가에 막힌 듯 답답했다. 캐서린은 입을 열었지만 말 대신 짧은 한숨만 걸리듯 나왔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목소리를 냈다.
“아버지의 생각은 변함이 없으셔요. 저도 설득하는 걸 포기했고요. 아마 당신의 집안도 비슷하겠지요. 앞으로 더 만날 일도 요원한데 그렇게 우울하게 칼질할 거예요?”
“캐서린.”
“탓하려는 거 아니니까. 봐요. 이제 우리 둘 다 손가락이 깨끗해요. 아무 사이도 아닌 것처럼. 제 잘못인가요? 당신은 그러고 싶었어요?”
앨버드는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고작 일 년 전 두 사람은 반지를 맞추었는데, 결혼은커녕 약혼 이야기도 꺼낼 수 없었다. 양쪽 부모님은 좋은 사업 친구로 언제나 이야기가 잘 통했으며, 이는 그들의 자식을 최소한 귀족 정도와 결혼시키겠다는 의견도 같았다는 뜻이다. 캐서린은 거절당한 날 반지를 서랍 안에 처박아 두고는 다시 꺼내 보지 않았다. 언제나 앨버드만 미련하게 반지를 끼우고 있었으나 오늘은 아니다. 어쩌면 오늘부터 아닌 걸지도 모른다….
“캐서린?”
익숙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캐서린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입구에서 종종걸음치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이를 쏙 닮은 올리브 빛 부드러운 눈빛과 갈색 머리카락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런 말을 하면 상대는 한 번도 빠짐없이 화를 내곤 했다. 캐서린! 저는 바보 같은 우리 오빠와 조금도 닮지 않았어요.
“여기서 보네요, …윽, 하필 앨버드와 함께. 모르는 귀족이랑 있는 것보다야 낫지만 말이에요.”
“식사는 했나요, 클라라? 물론 당신은 제가 누구랑 있더라도 인사하러 와 줬겠죠.”
“당연해요. 캐서린은 저의 친구이기도 하잖아요. 재수 없는 귀족과 불쌍한 식사를 하게 둘 수 없어요. 사실 지금도 진심으로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당신은 현명하고 아름다운데 남자를 보는 눈이…. 조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죠?”
이 말 후 여자는 자신의 오빠를 흘겨보았는데, 앨버드는 자동 반사에 가깝게 얼굴을 찡그렸다. 캐서린은 그 순간만큼은 클라라가 앨버드의 동생보다는 그의 진솔한 마음을 대변해 주는 새처럼 느껴졌다.
“너무 그러지는 말아요. 저희는 잘 이야기하고 있었는걸요. 그리고 앞으로 이렇게 볼 일도 없을 거예요.”
“네…?”
클라라는 그의 말에 눈만 깜박이더니 이내 험악해진 표정으로 앨버드의 등을 내갈겼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시원한 대답이었으리라. 사레들린 오빠의 가쁜 기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높고 카랑카랑해서, 레스토랑의 사람들이 한둘씩 그들의 테이블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캐서린은 일행이 아닌 척 시선을 피했다.
한 명은 너무 눈치를 보고, 한 명은 지나치게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사람을 적당히 섞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런 사람은 너무 완벽할 테니 온 빈의 사람들이 탐을 내게 되겠지. 몇 달 전의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다투었다면 속상함이나 수치심에 한마디 거들었을지도 모르나 이젠 아니다. 클라라의 분노는 약간 늦었고, 이미 두 사람은 손가락에 아무것도 끼고 있지 않았다. 무엇도 바꿀 수 없다. 캐서린에겐 알맞은 타이밍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건 거리의 부랑자도 아는 사실인데, 고작 아버지의 말 몇 마디에 헤어진다는 건 말도 안 돼. 제대로 설득이라도 해 봤어? 캐서린이 어때서? 내가 봐도 아쉬울 정도로 좋은 사람이야. 헤이든 가문의 사업도 부족함이 없다고! 바로 오늘 이졸데 양에게 들었어. 이제 디터스도르프 가문과도 계약을 맺었다고 하던데. 그들에게 좋은 토끼용 건초를 공급해 주었다고 하더라. 그런 가문의 사람과 왜 결혼할 수 없다는 거야? 우리가 대체 뭐라고? 추한 꼴이야.”
“클라라!”
참다못한 앨버드가 소리치자, 여자는 화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발치에 내려두었던 가방을 도로 집어 들며 나갈 채비를 했다. 캐서린은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클라라는 오빠를 험악하게 지나치며 앉아 있는 캐서린에게 몸을 숙여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캐서린. 소중한 시간을 망쳐버렸네요. 저도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소용없었어요. 겁쟁이 오빠를 대신해 사과드려요. 하지만…. 오빠의 책상 위에 여전히 반지가 있다는 걸 알아요. 버리기라도 하면 제가 대신 보관해 둘게요….”
캐서린은 그저 웃음으로 배웅하곤 여자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고마워요, 클라라. 캐서린은 다 식어버린 연어 조각과 짧은 문장을 꺼내지 않고 같이 삼킨다. 하지만 저 역시 추한 사람이랍니다.
Side D.
링슈트라세 거리가 이른 오후부터 한적하였다. 이런 일은 드물다. 눈에 띄지 않는 골목의 카페 주인으로서는 영 불운한 날이겠으나, Deborah는 어쩐지 느긋한 기분이 되어 가게 앞을 쓸었다. 이제 곧 이 앞도 울긋불긋한 낙엽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날이 서늘해지면 가게 앞 테이블에 앉아 햇볕을 쬐며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줄겠지만, 가게 안에 들어와 뜨거운 음료를 사 갈 사람은 늘어난다. 각자 장단점이 있는 거지. 무엇 하나 별로면 좋은 일도 하나 생기는 게 삶 아니던가.
데보라는 그냥 빗자루질에 신경 쓰기로 했다. 연신 몸을 움직이니 금방 땀이 났다. 올해 초가을은 예년보다 유달리 덥게 느껴졌다.
데보라는 기지개를 켜다 눈을 게슴츠레 떴다. 이쪽으로 조용히 걸어오는 누군가가 눈에 띄었다. 멀리서도 휘청휘청 걷는 모습이 마치 한낮의 귀신과도 같았는데, 가까워질수록 데보라는 의심스러워졌다. 저렇게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차려입은 귀족은 보통 이런 골목 끄트머리까지 발을 잘 들이지 않는다. 데보라는 얼른 가게 앞 가로등에 빗자루를 기대어 세우고는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얼굴을 알아보자마자 그는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빈에서 이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다만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지 누추한 카페 주인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다. 데보라는 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디터스도르프 아가씨, 이런 곳까지는 어, 어쩐 일로 오셨을지요. 찾는 사람이라도 있는가요?”
생각에 잠긴 듯한 이졸데가 이름을 듣고 그를 마주 보았다. 꿈꾸는 듯한 연자색 눈동자가 깜박인다. 데보라는 저도 모르게 짧게 탄식했다. 카페의 몇몇 손님이 종종 이졸데에 대해 떠들던 걸 기억한다. 그러나 이렇게 마주하니 그게 무슨 소리였는지 가물거리기만 한다. 예의없어 보이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다행히 이졸데는 카페 주인이 사람을 불러세워선 한숨이나 쉬고 있는데도 미동이 없었다.
“…… 테오필.”
한참 후에 이졸데는 대답했다. 데보라의 질문에 대한 대답보다는 허공에 누군가를 부르는 것과 같은 어조였다. 카페의 주인은 자신의 늙은 귀를 의심했다.
“예에?”
“오늘 아침 테오필이 제게 알려주었어요. 오후에 모임이 있을 예정이니 참석해 달라고…. 주소를 알려주었는데요. 분명히 이 카페라고 들었어요. 혹시 아닌가요?”
“글쎄요, 저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답니다. 오늘은 손님도 영 없고, 무슨 모임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리고… 그런 분이 이런 누추한 곳을 사교 장소로 골랐을 리도 없지 않겠어요? 뭔가 오해가 있으셨던 게 아닐까요?”
데보라의 말이 길어질수록 이졸데의 얼굴은 아주 조금씩 경련을 일으키며 굳었다. 걸어오느라 얼굴에 옅게 밴 땀이 레이스의 그림자 아래에 조용히 맺혔다. 데보라는 일행이라도 있는지 싶어 이졸데의 뒤를 휘휘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이졸데는 고개를 푹 숙이곤 무언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는데, 장년의 나이에 가까워가는 카페 주인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데보라는 하늘에서 떨어진 기회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작은 커피숍은 이졸데 폰 디터스도르프가 홀로 들렀다는 소문만으로도 급부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소문이 아니라 진실이 될 수도 있다. 그의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훨씬 부드럽고 친절해졌다.
“아이고, 날이 덥지요. 이를 어째? 물이라도 가져올 테니 좀 앉아 있다가 가셔요.”
“전부 제 잘못이에요. 다시 돌아가 물어볼 수도 없는데. 테오필은 이미 올바른 장소에 가 있을 테고, 저는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요. 어떻게….”
“이 밖 자리가 가게 안보다 거리 구경하기가 좋아요. 자, 앉아 계시면 금방 마실 것을 내 오지요. 빈의 자랑에게 어떻게 돈을 받을 수 있겠어요!”
어쩌면 오늘 손님이 없었던 건 지금을 위해서일지도 몰랐다. 물론 그건 이 모습을 보고 소문내 줄 사람도 없단 뜻이지만 누구 한 명 정도는 오가며 보게 될 테지.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온 데보라의 손길이 급해졌다. 당장 생각나는 건 그야 카페이니 시그니처 커피였지만, 이 신비롭고 알 수 없는 오페라 가수는 다른 걸 원할지도 몰랐다.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는 건 당연하고 평범한 일이니까 별로일 수도. 데보라는 제 가게가 빈 전체에 견주어 볼 때 대단히 독특한 커피 레시피를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겨우 남들과 엇비슷한 정도의 로스팅 커피가 전부였다.
그게 성에 차지 않아 자리를 뜬다면? 도리어 안 좋은 소문이 퍼지게 된다면. 차라리 찻잎 통을 털어다가 진한 홍차를 한 잔 낼까?
데보라는 허둥지둥 물을 올리고 선반을 뒤졌다. 한편으론 그새 소중한 손님이 떠나지 않았는지 연신 힐끔거렸다. 이졸데는 나뭇가지의 작은 새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를 안전히 붙잡아 둘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더라면! 데보라는 결국 물이 끓을 때까지 밖에 나와 있기로 했다.
“저, 아무래도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잠깐이면 됩니다. 목을 축이고 가셔요. 여기가 비록 사거리에 있는 카페보다야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무척 유서 깊은 장소랍니다. 그러니 있다가 가시지요.”
데보라는 저도 모르게 떠오르는 대로 지껄였다. 이 커피숍은 그의 남편이 오래된 건물을 겨우 사서 고친 것으로, 별 내력이랄게 없다. 하지만 귀중한 손님을 앞에 두고 지금 그게 중요하겠는가! 공허하게 맴돌던 이졸데의 시선이 가게의 간판으로 향했다.
“아, 무척 아름다운 간판이네요. 새것 같아요.”
“그것은 저희 아들 녀석이 그린 간판이지요. 미술을 배웠거든요. 아들도 오래전 공부를 위해 이곳을 떠나서, 시간이 흘러도 간판을 고칠 사람이 없지 뭡니까. 별수 없이 제가 직접 간판을 새로 덧칠해 두었답니다. 감쪽같죠! 아가씨께서는 오늘 처음 보시니 본디 어떤 그림이었는지 모르시겠지만….”
가게 안에서 주전자가 들썩이며 수증기를 내뿜는 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데보라는 안으로 들어와 준비한 커피잔에 주전자로 원을 그리며 물을 부었다. 뭉글거리는 거품이 좋은 냄새와 함께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가 카페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쟁반에 잔을 받쳐 들고 나왔을 때, 테이블에는 또 다른 손님이 와 있었다.
“이졸데, 여기서 뭘 하고 있나요? 오늘 서클이 있지 않아요? 저도 늦게나마 참여하려는 참인데, 당신은 이미 도착했을 거로 생각했거든요!”
“죄송해요. 제가 카페의 이름을 착각했어요. 그런데…. 저를 찾아내셨군요, 선생님.”
“물론이에요.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는걸요.”
데보라는 물론 이 챙 넓은 모자를 쓴 여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두 사람 사이로 나서서 쟁반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앉아 있는 이졸데의 머리가 상대에게 기대듯 기울었다. 유려한 검은 머리카락이 같이 흘러내렸다. 젊은 의사의 손길은 자연스레 그의 머리로 향했는데, 손등이 머리에 살짝 닿자마자 기겁했다.
“맙소사,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던 거예요? 머리가 햇볕에 뜨거워…. 그렇게 더운 날씨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잠깐만요. 얼굴도 평소보다 빨갛고, 땀도 흘리고 있네요. 왜 카페 안에 들어가 있지 않았나요!”
어정쩡히 둘 사이에서 쟁반을 들고 서 있던 여주인은 어쩐지 인상 쓴 젊은 의사를 마주해야 했다. 양손을 쓸 수 없는 데보라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는 일이었다. 한편으론 그녀가 살짝 유난이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이졸데의 얼굴은 아까보다 좀 상기되어 있는 것도 같았지만, 아파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용서하세요. 오래 앉아 있지 않았어요. 조금 피곤했을 뿐이에요. 저희 이제 가요.”
“당신이 이렇게 몸이 좋지 않은데 어딜 가나요. 오늘 하루만큼은 서클이니 뭐니 잊어버려요! 저도 같이 빠질게요. 푹 쉬는 게 우선이에요. 분명 테오필에게 모임 장소를 전달했는데…. 이졸데, 당신이 잘 못 듣진 않았을 거예요. 보나 마나 테오필이 실수했겠죠. 저도 종종 비슷한 실수를 하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오후 시간은 제 진료소에서 푹 쉬다가 돌아가요. 네?”
이졸데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여인은 그걸 망설임으로 해석한 것인지 몸을 숙여 손을 맞잡았다.
“그렇지만 분명 저흴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흐응, 오래 기다리진 않을걸요? 알잖아요? 금방 다른 이야기에 정신 팔리겠지요. 정 오지 못한 이유를 따져 묻는다면 그래, 길에서 앵무새와 부딪혔다고 하세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후후.”
쟁반을 쥔 카페 주인은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가게 안에 들어와 잔을 내려놓았다. 대화는 곧 끝날 것 같았으나 저 사이에 커피를 두기는 어려워 보였다. 데보라는 그렇게까지 뻔뻔하진 못했다.
카페 앞에서는 여전히 두 사람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카페 주인이 조심스레 다시 밖을 나왔을 때 두 사람은 이미 작아지는 뒷모습뿐이었다.
젊은 의사는 오페라 가수를 부축하듯 팔짱을 끼고 있었다. 반대쪽 손은 어정쩡히 들어 올린 채였는데, 마도술을 부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를 증명하듯 커다란 거울이 상대의 오른쪽에 두 사람의 발걸음을 맞추어 비스듬히 부유했다. 거울은 완벽하게 이졸데에게 그림자를 드리워 주었다. 본래 목적과 하등 상관없는 모습이 퍽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이미 이졸데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카카니아의 목소리는 하도 커서 그의 귀에도 들렸다.
뭣하면 이 거울로 당신을 괴롭힌 태양의 속내도 읽어 볼게요!
데보라는 어쩐지 자신의 카페에 이졸데가 들렀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아졌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떠나가고 카페에는 식은 커피 한 잔만이 남았다.
